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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무장공비 김신조, 별세… 1.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그 이후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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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9일,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 김신조 목사가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그는 단순한 귀순자가 아니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던 무장공비였다가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해 목회자로 살았던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1968년 1.21 사태 – 청와대 습격 사건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의 공작원 31명이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청와대를 습격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청와대로부터 단 300m 떨어진 지점까지 침투했던 이 작전은 ‘1.21 사태’ 혹은 ‘김신조 사건’으로 불린다. 총 31명 중 29명은 사살되고, 1명은 미확인 상태로 남았으며, 유일하게 생존하여 투항한 인물이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김신조는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발언으로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당시 북한은 이 작전을 베트남 전쟁 당시 테트 공세와 유사한 대규모 혼란 작전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초기 계획은 세 자리 숫자의 병력을 투입해 청와대 기습뿐 아니라 미 대사관, 국방부, 교도소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여 서울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혼란 중 탈옥시킨 죄수들과 함께 월북해 반정부 혁명처럼 포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작전은 축소되었고, 최종적으로 30여 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청와대만을 공격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이들은 침투조, 습격조, 탈출조 3개 조로 나뉘어 각자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침투조가 경계를 제압하면 습격조가 청와대를 공격하고, 탈출조는 청와대 내 차량을 이용해 동료들을 싣고 북쪽으로 도주하는 식의 고속 작전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고작 3~4분 내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 소속이었다.

 

그러나 자하문 고개에서의 경찰 불심검문으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했고, 곧바로 군경 합동 작전으로 무장공비 대부분이 사살되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무장공비 김신조무장공비 김신조
무장공비 김신조


피해 현황

‘1.21 사태’는 단순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 사회는 크나큰 충격과 함께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 북한 공비: 29명 사살, 1명 도주, 1명 생포(김신조)
  • 군경 사망자: 23명
  • 민간인 사망자: 7명
  • 군경 및 민간인 부상자: 52명

총합해 30여 명의 사망과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국내 치안 역사상 매우 중대한 테러 사건이었다.

무장공비 김신조무장공비 김신조
무장공비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달라진 대한민국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와 군, 국민 전체에 심대한 안보 위기의식을 심어주었고, 그에 따라 사회 전반에 다양한 제도 변화와 방어체계 강화가 이루어졌다.

  • 향토예비군 및 방위병 창설: 주민이 스스로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자위조직이 탄생했다.
  • 고등학교 교련 과목 도입: 안보 교육을 정규 교과에 포함.
  •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전국민 실명 등록 체계 강화.
  • 설악개발단, UDU, 684부대 등 보복부대 창설: 대북 대응 및 특수작전 수행 목적.
  • 유격훈련, 천리행군, 5분 대기조, 전투경찰대 실시: 실전 대비 훈련 강도 강화.
  • 육군3사관학교 및 공군기술고등학교 창설: 전문 장교 양성기관 확대.
  • 북악산·청와대 인근 통행금지 및 보안강화: 대통령 경호 및 청와대 방호체계 강화.
  • 군복무 기간 연장: 병력 유지 및 전투력 강화.
  • 이순신 장군 동상 설치, 반공 웅변대회 탄생: 애국심 및 반공 사상 고취.
  • 북악스카이웨이 준공: 수도권 방어와 교통 확보 목적.

이처럼 '1.21 사태'는 단순한 침투 사건을 넘어, 대한민국 현대사와 안보 정책의 방향을 바꾼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무장공비 김신조무장공비 김신조
출처 예비군 홈페이지


귀순 후 삶의 전환

생포 이후 김신조는 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과 북한의 현실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 아래 귀순자가 되었지만, 그는 한동안 죄책감과 방황에 시달렸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한 여인의 편지였다. 김신조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최정화 씨와 1970년에 결혼하게 되었고, 그녀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그는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1981년 침례를 받은 후 1989년에는 ‘기독인귀순용사선교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1997년, 사건 발생 29년 만에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다.

 

복음 전도자, 그리고 안보 강연가

김신조 목사는 전국 4,000여 개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서울 성락교회와 남양주 삼봉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또한 군부대나 공공기관의 초청을 받아 안보 강연도 꾸준히 이어갔다. 그는 북한 체제의 실상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2010년에는 한나라당 북한 인권 및 탈북자·납북자 위원회의 고문으로도 활동하며 공적 활동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김신조의 인생이 주는 메시지

김신조의 삶은 단순한 전향자나 귀순자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한때는 무장공비로 남한에 침투했지만, 이후 신앙과 가정, 사명을 통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갔다.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가능성과 변화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나는 죄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남은 생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제 김신조 목사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드라마 같은 삶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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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비 김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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